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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연구 결과물 > 전통혼례상차림 > 혼인제도의 변화
혼인제도의 변화

우리 민족의 서입혼(婿入婚, 신랑이 처가로 들어가는 혼. 일명 처가살이혼 또는 데릴사위혼이라고도 함)은 150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다. 이는 신랑이 정식 혼례를 올리기 전에 신부집에서 기거하는 풍습으로, 신부집에서 신방을 준비하고 사흘째 되는 날 부부가 동뢰연(同牢宴, 굳게 한 몸이 되는 연) 상을 받는다

이 서입혼은 고려 말 정몽주 등이 봉건적 신분제도와 가부장제적 질서 유지를 강화하고자 혼례에 관한 일련의 개혁 조치를 단행하면서 변화를 맞는데, 1349년 공민왕과 노국공주가 친영혼(親迎婚, 시집살이혼이라고도 함, 신랑이 몸소 신부를 맞아 신랑 본가로 들어가는 혼)을 치르면서 과도기를 맞는다.

친영혼이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니다. 고려는 건국 초부터 신라의 전통을 기초로 토속적인 것과 불교적인 것을 유지시키면서 당나라 유교 예법을 도입하여 관혼상제를 정립하였다. 고려 중엽에는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관혼상제 의식이 불교식과 융합된 형태로 정착되고 있었다. 정몽주의 개혁조치는 느슨해진 사회 기강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고, 공민왕이 솔선수범하여 친영혼을 감행했지만 파급 효과는 미미했다.

정치사상적으로 정권 안정을 꾀했던 조선왕조는 중국 주나라의 유교 경전인 『의례(儀禮)』를 기본으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성종 5년)를 제정하였다. 국가의 기본 예식인 길례(吉禮)·가례(嘉禮)·빈례(賓禮)·군례(軍禮)·흉례(凶禮) 등 다섯 가지 예법과 절차를 예시한 것이다. 혼례는 가례에 속해 있다.

조선왕실은 친영혼을 납채(納采, 부인으로 채택하는 것을 증명하는 예물을 받아들이는 예)·납징(納徵, 혼약의 증거로 사자를 보내어 폐백을 받게 하는 예)·고기(告期, 신랑집에서 정한 혼례 기일을 신부집에 알려주는 예)·친영(親迎, 신랑이 몸소 신부를 맞이하는 예)·동뢰(同牢)·조현(朝見, 신부가 시부모님을 뵈는 예)으로 구성하였다. 세종 원년에는 왕가의 혼인을 친영례로 제정한다고 교시를 내렸지만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왕실조차도 관행으로 이어져온 서입혼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중종 7년 10월에 다시 교시가 내려진다.

조선의 풍속은 신랑이 신부집에 가는 것을 정식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고례(古禮)에 어긋나는 것이다. 지금부터 왕자와 왕녀의 혼인은 모두 고제(古制)에 따라 행한다.

중국식 혼례[親迎禮]의 흔적은 신라 신문왕이 김흠운의 작은 딸을 고기·납채·납징·친영을 거쳐 왕비로 맞이한 기록에서도 나타난다.

2월에 이찬과 파진찬을 보내 기일을 정하였다.
대아찬을 보내 납채하게 하였다.
5월 7일에 이찬 등을 보내 책봉하여 부인으로 삼았다.
5월 7일 묘시(卯時, 5~7시)에 파진찬 등 30여 명을 보내 부인을 맞아 오게 하였다.

신라왕가의 제도를 이어받은 고려왕실 혼례도 비슷하였다. 정도전이 고려왕실의 과도한 납채 폐해를 지적할 정도로 사치는 극에 달했는데 귀족 계급들도 납채에서는 반드시 예단(禮緞, 예폐로 보내는 비단)을 사용하였다

고려 의종(1147~1170) 조에 상정한 육례(六禮, 납채·납징·고기·친영·동뢰·조현)에 준하는 예문(禮文)을 보면, 고려왕실이 신라왕실보다 더 엄격한 중국식 혼례를 치르고자 한 것 같다.

어쨌거나 중종은 재위 20년이 되는 해에 왕이 직접 신부를 맞이하여 궁궐로 데려오기 위해 문정왕후를 친영 장소로 정한 태평관에서 몸소 맞이하였다. 육례는 중종 이후 정착되어 조선왕조가 패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조선왕조가 『의례』와 『주자가례(朱子家禮)』를 근거로 친영혼을 적극 채택하여 시행하고자 했지만, 이러한 조치들은 당시까지만 해도 보편적이었던 서입혼을 뿌리째 흔드는 것을 의미했다. 서입혼은 17세기까지도 지속되었다.

율곡 이이(李珥, 1536~1584)의 어머니인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이 살던 시대에도 서입혼이 성행했다. 신사임당은 19세에 이원수와 결혼해 20년 동안 친정집에서 살고, 38세가 되어서야 시집에 들어가서 9년 정도 살았다. 서입혼이라는 제도가 신사임당의 예술적 기예에 기여했다고도 볼 수 있다. 사임당이 조선시대 여성들이 일반적으로 겪었던 시집살이의 정신적·육체적 고통에서 벗어나 ‘시·서·화의 삼절’이라 불릴 만큼 예술적 소양도 닦고 현철한 어머니가 될 수 있었던 것에는 20년간의 친정살이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서입혼 관행이 뿌리 깊게 이어지면서 위정자들은 『주자가례』에 근거한 개혁의 필요성을 느꼈다. 왕가 혼례에서 친영혼의 정착은 중종 때 이루어지는데, 반가에서도 중종 13년에 유학자 김치운(金致雲)이 최초로 친영혼으로 혼례를 치렀다. 하지만 중종 14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광조(趙光祖)가 처단되면서 친영혼은 폐지되었다.

명종 조에 들어 반가에서 반친영혼(半親迎婚)이 등장하게 된다. 반친영혼은 1500년대 후반이 되면 상당히 광범위하게 보급되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급속히 보급되어 서민들도 반친영혼을 치른다. 반친영혼이란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동뢰연을 치르고 다음날 아침 신부가 신랑집으로 가서 시부모에게 현구고례(見舅姑禮, 폐백)를 올리는 것이다. 서입혼에서는 신랑이 신부집에 기거하다가 신방을 준비한 사흘째 되는 날 동뢰연이 행해졌지만, 반친영혼에서는 당일 혼례를 치루는 것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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