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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연구 결과물 > 연변 조선족 전통음식 > 보고서 > 이주와 음식문화
3. 연변 조선족의 이주와 음식문화 형성 배경

3. 연변 조선족의 이주와 음식문화 형성 배경
음식은 해당 공간의 자연적인 환경과 사회적인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형성되거나 변화한다. 특히 연변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은 중국의 동북부지역에 자리를 잡은 후 새로운 자연환경과 사회적 환경에 맞는 음식문화를 창출해 내었다. 곧 연변 조선족은 중국의 동북지역이라는 전혀 다른 자연환경에 적응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 여러 차례의 역사적 격변기를 거치면서 한반도와 구별되는 음식문화를 영위하여 왔다. 또한, 한족을 포함한 주변 민족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족 가정에서의 음식문화 특히 ‘밥, 김치, 국’이라는 기본적인 식단은 현재까지도 유지하고 있다.(1) 여기서는 조선족 음식문화 형성에 영향을 주었던 연변 조선족 거주 지역의 자연적 환경과 사회적 환경을 제시하고자 한다.
1) 자연적 환경
조선족은 길림성을 비롯하여 요녕성, 흑룡강성 등에 산재해 거주한다. 이번 연구 대상 지역은 길림성이며, 길림성 가운데도 연변에 집중하고자 한다. 길림성은 동북3성 가운데 조선족 인구가 가장 많이 모여 사는 곳이다. 길림성의 면적은 187,400㎢이고, 인구는 약2,745만 명이며, 그 가운데 조선족 인구가 104만 명으로 전체의 약 3.8%를 차지하고 있다. 길림성 거주 소수민족 총 인구의 47.59%로, 연변의 조선족 인구는 길림성 조선족 인구의 70.85%이며, 길림시는 13.20%를 차지한다(2010년 제6차 인구보편조사). 길림성의 민족 구성은 조선족과 한족은 물론 만주족(39.73%), 몽고족(6.63%), 회족(5.44%), 시버족(0.14%) 등이 거주한다. 길림성은 동북3성의 중부에 위치한다. 동경 127°27´∼131°18´, 북위 41°59´∼44°31´이고, 백두산지구에 속한다. 길림성에는 산맥이 가로 세로로 뻗어 있고, 지형이 복잡하여 산지면적이 총면적의 75%이다. 그 가운데, 천문봉이 최고봉으로 해발 2,670m이고, 도문강구(圖們江區)는 해발 5m이하이다.
길림성에서 유일한 조선족 자치주인, ‘연변조선족자치주’는 길림성 동남부에 위치하며, 동남쪽으로는 두만강을 경계로 한반도(함경북도)와 인접하고, 동북쪽으로는 러시아와 인접해 있다. 서쪽은 길림성의 교하, 화순, 무송현 등과 접하고, 북쪽으로는 흑룡강성의 동녕현과 영안시 등에 접해 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총면적은 42,700㎢로, 이는 한반도 면적의 1/5이다. 남한의 경기도, 강원도, 충청남북도의 면적과 비슷하고, 길림성 면적의 1/4에 해당한다. 지형은 서쪽, 북쪽, 동쪽은 높고 동남쪽은 낮아 마치 ‘말발굽’ 모양을 하고 있다. 대체로 연변지역의 지세는 백두산이 위치하는 서남부와 서북부는 높고, 남동부는 낮은 편이다. 장백산맥이 서남부를 점하고, 해발 500m∼1,000m의 지역이 전 지역의 78%를 차지하며, 해발 500m이하의 지역은 20%, 해발 1,000m∼2,000m 지역은 1,9%, 그리고 2,000m이상의 산지는 0.1%를 각각 점하고 있다. 서남, 서북, 동북 세 개 면으로부터 동남쪽으로 경사져 있으며, 훈춘일대가 제일 낮은 편이다. 경지 면적은 2,365㎢이고, 그 가운데 밭의 면적은 76.5%이며, 논의 면적은 23.5%이다. 따라서 연변지역은 논농사보다는 밭작물 중심의 밭농사를 위주로 한다.
연변지역은 삼림(森林)자원, 수력자원, 광물자원, 토산물자원 등이 풍부하여 생산과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 좋은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다. 임지(林地) 면적이 347,15만㏊(연변 전체 면적의 81.3%)이며, 1,500여종의 식물이 있는데 대부분 경제식물이다. 연변지역의 삼림자원을 보면 장백산구에 120여종의 목본(木本)식물이 있는데, 그 중 홍송, 백송, 가문비나무, 전나무, 장백낙엽송 등의 침엽수와 들메나무, 황경나무, 달피나무, 고로쇠나무 등의 활엽수는 경제적 가치가 높은 용림재이다(30여종 있음). 또한 800여 종의 약용식물이 생장하고 있는데, 이름 있는 약재로는 고산 홍경초, 영지, 당삼, 황기, 천마, 평패모, 토황련, 세신북오미자 및 동북가시오갈피나무 등이 있으며, 식용균류식물은 송이버섯, 느타리버섯, 검정귀버섯, 개암버섯, 느릅나무버섯 등이며, 100여종의 산나물(고사리, 고비, 두릅, 도라지, 취나물 등)과 경제적 가치가 높은 야생과일(잣, 개암, 호두, 들쑥, 다래, 머루 등)이 있다. 연변의 울창한 산림은 야생 경제동물의 매우 유리한 생태환경을 만들어 주어 포유동물 50여종(자주빛 담비, 동부검, 표범, 꽃사슴, 사향노루, 수달, 곰 등)이 있으며, 이들 동물에서 얻은 약재로는 녹용, 녹태, 웅담, 오소리기름 등이 있다. 그리고 조류 200여종, 파충류, 양서류, 어류 등이 300여종이 있다.
연변의 기후는 중온대 습윤계절풍 기후에 속하는데, 계절풍이 뚜렷해서 봄에는 건조하고 바람이 많으며 여름에는 덥고 비가 많이 내린다. 이러한 기후는 농사짓기에 적합한 토양을 만드는 데 일조한다. 곧 토양의 풍화과정과 부식과정이 촉진되어 비옥한 토양을 형성하고 있으며 토양의 유형은 암갈색삼림토, 백장토, 습초원토, 충적토 등이다. 특히 가을에는 서늘하고 비가 적게 내리며, 겨울에는 추위가 오래 지속된다. 기후적으로 겨울은 길고 추우며, 여름은 짧고 따뜻하다. 평균기온은 겨울이 -14°C∼-20°C이고, 여름은 16°C∼25°C로 나타난다. 연강수량은 350∼1,000㎜에 이르며, 6∼8월 사이에 한 해 강수량의 60%이상이 내린다.
하천은 두만강, 압록강 및 중부지역의 송화강 등이 흐른다. 이들 하천 유역으로 형성된 연변지구는 토질이 비옥하고, 농업개간에 알맞으며 또한 여러 강의 상류지대에는 삼림이 무성하여 목재가 많이 난다. 여름에는 수력을 이용하여 목재를 하류의 시로 수송한다. 하류지대에는 거의 수전을 이루고 있고, 부르하통하와 해란강 유역은 대부분이 논농사지역이다. 가야하와 훈춘강 유역에도 수전이 많이 분포한다.
연변의 주요도시는 중심도시인 연길을 비롯하여 용정시, 훈춘시, 도문시, 돈화시, 화룡시 등 6개시와 안도현과 왕청현 등 2개의 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형적으로 볼 때 중부지역은 평원으로 구성되고, 동부는 산지와 주요 농산물로서는 쌀, 콩, 옥수수, 벼, 보리, 잎담배 등을 재배하며, 동북3성에서 주요한 농업생산지로 자리하고 있다. 연변의 농업은 새로운 농업기술의 지속적인 보급으로, 주요한 식량작물로는 벼, 옥수수, 콩 등이 있으며, 벼농사는 연변지역에서 1㏊당 벼생산량이 5,000∼7,500㎏정도이다. 한편 과수로는 주로 사과배(2), 사과, 배, 해당, 살구 등을 재배하며, 과수면적은 8,441㏊이고, 연간 총생산량은 48,711t인데, 그 중 사과배 생산량이 과일 총생산량의 69.5%를 차지한다. 그 외 담배, 아마 등이 재배되고 있다.
또한, 연변의 공업 가운데 식료품 가공업이라고 할 수 있는 양곡기름가공 및 육류가공, 연초제조, 통조림가공, 양주제조 등이 1,000여 종 있다.
- 연변조선족자치주 지도(3) -
2) 사회적 환경
연변조선족자치주는 200만 조선족의 고향이자 한민족의 유무형의 전통생활문화 유산들의 보존지이다. 이곳의 다수민족은 조선족으로 중국 동북지역 근현대 역사의 주인공이자 동시대 해외 한민족 이주정착사의 자랑이다. 이곳은 1882년 청조의 봉금령 이후 조선족의 본격적인 정착이 시작되어 각종 전답농사의 성공신화가 펼쳐진 곳으로, 조선족의 농경생활문화(두레, 농경세시, 풍농의식 등)의 전통이 계승되어 왔다. 특히 용정을 중심으로 1910∼40년대 애국계몽운동(이상설, 김약연, 윤동주, 나운규, 서전서숙, 명동학교, 대성중학 등) 및 무장항일운동(일본영사관, 해란강, 일송정 등)이 벌어졌던 역사의 격전지이기도 하다. 조선족의 생활문화전통은 조선족 사회를 단결시켜주는 매개체이자 한민족의 혼과 정체성을 유지시켜주는 정신적 고리 역할을 해왔다.
동북 3성에 거주하는 조선족의 특성을 살펴보면 첫째, 인구분포상의 특성은 연변지역은 함경도, 길림성은 경상도와 전라도 등 삼남지방, 요녕성은 평안도, 흑룡강성은 경상도와 전라도(함경도) 출신이 대부분(주류)이다. 이와 같이 연변과 요녕성에 한반도 북부에서 이주한 조선족이 많은 것은 초기 이주 한인들이 국경을 넘기 쉬었기 때문이며, 흑룡강성과 길림성에 한반도 남부에서 이주한 조선족이 많은 것은 만주국시대 강제 이주(개척농장)에 의하여 나타난 현상이다. 연변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은 평지에 거주하며, 주로 1990년대까지 논농사를 지었으나, 이농현상으로 농촌 인구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구석기시대의 인골이 안도현에서 발견되어 이를 ‘안도인(安圖人)’이라 한다. 안도인의 존재로 보아 안도현에 구석기인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시대 이곳에는 퉁구스계의 예(濊)와 맥(貊)족 등이 거주하던 지역이다.(4) 그러나 현재 이주에 의해 거주하는 조선족들은 19세기 후반에 터전을 마련한 것으로 보는 것이 보편적이다. 조선족의 이주시기 및 경로에 따라서 지역적 분포가 다양하고, 생활방식도 다양하다. 또한, 한반도 조선인이 중국에 이주한 시점과 시기구분에 있어서 학자들 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5) 특히 이주한 시점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들이 있다. 오늘날의 조선족거주지가 보편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1860년대를 그들의 이주시점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 반면, 역사문헌으로부터 당·송시기를 이주 시점으로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문제점은 역사학자들이 정리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이 글에서는 연변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을 대상으로 그들의 이주와 생활상을 중심으로 음식문화 형성의 사회적 환경을 제시하고자 한다.
(1) 개척민 월경(越境)
이 시기는 오늘날 조선족 거주지가 형성되는 시점으로 그들의 이주 역사는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의 ‘간도지역’을 중심으로 시작된다. 한반도 조선인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월경하는 사례는 청나라 초기에도 있었으나, 성격상 채삼(採蔘)과 벌목(伐木)을 목적으로 하거나, 기민(饑民)의 유입에 의한 일시적인 월경에 불과했다. 경작을 목적으로 한 집단적이고 대규모적인 형태의 월경은 19세기 중엽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특히, 1860년부터 한반도 북부의 자연재해는 이 시기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 속출하게 된 주요 원인으로 주목되며, 또한 ‘가정(苛政)이 맹호보다 심할 정도’로 조선 관원의 탐학도 이들이 조선을 떠나 국경을 넘게 한 주요 요인으로 볼 수 있다. 곧 청나라 정책상의 변화와 간도지역이 장기적인 봉금(封禁)으로 인해 토지가 비옥하고 공터가 많았다는 점은 관리의 탐학과 자연재해로 시달리던 조선인에게 국경을 넘게 한 계기가 되었다.
조선족의 초기 정착과정에 있어서 청나라의 ‘봉금정책’으로 인해 소수의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의 ‘청국봉금지대’에 화전을 일구어 조경모귀(朝耕暮歸)하는 일일 경작의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그 후 청국의 관제가 느슨해지자 잠입 주기가 조금 길어져 춘경추귀(春耕秋歸)하는 식으로 농사를 짓게 되었다. 그 후 청국의 ‘봉금령 폐지’와 ‘초민개간 정책’으로 한반도 국경을 넘는 사람들이 급속히 증가함에 따라 중국에서의 조선족 정착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농사를 위주로 하는 조선인의 유입은 당시 수렵과 목축업에 종사하는 만족인의 생활에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변무를 강화하고, 재정 수입을 늘이는데 도움이 되었다.
1891년 훈춘의 초간총국과 월간국을 합병해 무간총국을 설립하였다. 따라서 1880년대부터 북간도 지역 조선이주민은 20,899명으로 주로 화룡욕(현 용정시 지신향) 관할 내에 분포되어 있었고, 후에 점차 한족 개간민 구역(후 연길청 관할구역)으로 확장되었다. 1904년 북간도지역의 조선이주민은 5만여 명에 달하였다. 그들의 지역적 분포에 있어서 서쪽은 연길청 서부 백두산 동쪽의 외육도구까지, 동쪽은 훈춘하 유역, 북쪽은 동불사, 하마탕, 수분전자 등 지역으로 연길청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2) 1905∼1931년
이 시기 중국으로의 조선이주민은 정치적인 이유로 인한 이주와 경제적인 이유로 인한 이주 두 가지로 나타난다. 전자는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과 1910년 한일합방, 그리고 1919년에 3.1운동을 계기로 반일지사들의 이주가 대표적이었고, 후자는 한일합방 이후 경제적인 수탈로 인해 호구지책이 어려워진 농민들의 이동이 대표적이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이주는 당시의 여러 가지 제한으로 인해 매우 제한적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일제의 경제적 수탈로 인한 극심한 빈곤화가 이주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어 파산농민들의 이주가 주체로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1918년과 1919년에 걸친 한반도 남부의 대흉작과 이 시기 조선이주민이 급증하는 직접적인 계기로 볼 수 있다. 또한 1909년 체결된 간도협약을 통해 일본은 간도지역에서의 치외법권을 갖는 동시에 중국정부에게 ‘한민이 두만강이북에서 계속 거주하는 것을 허용하고, 두만강집거구역에 있는 모든 한민의 땅과 가옥에 대해 화민산업과 동등하게 보장해 줄 것을 요구함’으로써, 조선 이주민의 간도지역으로의 이주 정착을 촉진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 만주지역의 조선이주민 수는 50%이상이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인 북간도지역에 분포하고, 나머지는 북만과 남만의 각 지역에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다.
(3) 1931∼1945년
조선총독부는 만주의 침략과 조선의 파산농민 처리를 위해 대량의 조선 농민을 만주에 이주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당시 (조)선인이민회사 설립 계획안에 따르면, 총독부는 매년 조선 농가 1만호의 인구 5만 명씩을 15년간 만주에 이주시킬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1932년에는 그 수를 배로 늘려 강제이민을 위한 토지수탈과 이민모집방안 등을 마련하였다. 1932년부터 1935년까지 일제의 식민회사인 ‘동아권업회사’는 남만과 북만의 조선이주민들을 영구현 전장대, 철령현 난석산, 류하현 삼원포, 흑룡강성 주하현 하동과 수하현 수화부근에 집중시켜 ‘안전농촌’을 세웠다. ‘안전농촌’은 ‘자작농창정계획’을 바탕으로 일제의 ‘통제·안정정책’에 맞추어 건설된 것으로 소작농을 ‘자작농’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1936년 만주의 치안이 안정됨에 따라 만주지역에서 경제적 약탈을 강화하기 위해 쌀 생산을 목적으로 조선개척민의 강제집단이주를 계획하였다. 1936년 8월 ‘재만조선이주민지도요강’을 제정하여, 이주가구를 1만호로 계획하고, 이주지역을 간도성 및 구동변도의 23개 현에 국한하며, 국경지대의 조선이주민은 지정된 지역에 이주해야 함을 규정하였다.
(4) 1945∼1950년
종전 직후의 1년간은 다수의 재만 조선이주민이 한반도로 귀환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조국이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점과 종전 직후의 만주지역의 열악한 사회 환경은 만주조선인의 한반도 귀환을 초래하는 두 개의 주요원인으로 되고 있다. 광복 이후 만주조선인 사회는 순식간에 공포와 불안에 휩싸였다. 그들은 토비(土匪)의 학살과 중국인들의 배척으로 인한 이중 압력을 감안해야 했다. 특히 만주조선인의 80∼90%가 거주하고 있는 농촌지역은 무정부상태이며 무장한 토비들이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반면, 연변지역은 조선인들의 피해가 가장 적었다. 1945년 10월 중국공산당정권이 연변에 수립되면서 토비를 숙청하고, 토지개혁을 실시하며, 또한 일련의 ‘민족단결정책’을 제정함으로써 민족 모순이 상대적으로 완화되고, 조선인의 생활도 안정되어 갔다. 이로 인해 만주지역에서 내려온 조선인들로 인한 주택과 식량부족이 가장 큰 문제였다. 연변조선족자치주는 1949년 주덕해에 의해 조선족 자치가 주장되었다. 이후 1952년 8월 연길시, 연길현, 화룡현, 왕청현, 훈춘현, 안도현 등 1시 5현의 3,000여명의 대표자들이 모여 제1기 인민대표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연변조선족자치구가 공식적으로 성립되었고, 1954년 4월 제정된 신헌법에 따라 1955년 12월 연변조선족자치주로 승격되었다.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중국과 한반도의 국경지대에는 북한과의 인적이동이 빈번하였으며, 북한으로부터 많은 피난민들이 중국 국경지대로 몰려들었다. 그들 중 일부분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북한에 돌아가지 않고, 현지에 남아 생활하였는데, 이러한 상황에 대해 중국정부는 1953년 8월 17일 중국공민에 관한 지시를 반포하였다. 곧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기 이전에 동부 경내의 농촌에서 토지, 가옥을 분배받은 자, 중국인민공화국 성립 이전에 도시에서 직업을 갖고 정주한 자’는 중국공민으로서 조선족으로 인정하나, ‘과거에 조선교민으로 등록한 자는 여전히 조선교민으로서 변경이 불가능하며, 1949년 10월 1일 이후 새로 동북지역에 이주한 자는 모두 조선교민으로 취급할 것’을 지시하였다.(6) 이러한 지시는 조선족의 국적에 관한 최후의 결정으로서 중국으로 이주한 조선인의 본격적인 정착의 시작을 의미한다.(7)
  1. 최민호, 「고집과 포용」, 『한국학연구』31집,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3.
  2. 사과배는 1920년대 최창호가 함경도에서 가져온 배나무 가지를 돌배나무에 ‘가지 접붙이기’ 통해 세상에 나왔다. 이후 사과배는 품종개량을 거쳐 연변의 기후에 맞는 품종으로 재탄생되었는데, 신품종 사과배가 연변의 명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나갈 수 있게 된 것은 1950년대 들어서 부터이다.
  3. 네이버 지식백과
  4. 국립민속박물관, 『중국 길림성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1996, 30쪽.
  5. 한상복은 『중국 연변의 조선족 : 사회의 구조와 변화』(서울대학교 출판부, 1993)에서 현재 연변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의 이주 역사를 3단계로 나누어 분석하였다. 이주 시점을 조선조 후기인 1860년대로 보고 있으며, 1860년대에서 1910년대까지를 이주의 첫 단계로서 개별적인 ‘월경(越境)이주시기’로 정의하고, 1910년대 및 1920년대의 이주를 2단계로 ‘한일합방에 의한 조선인의 이주시기’로 정의하며, 1930년대에서 1945년 광복까지를 세 번째 단계로 일제의 만주침략에 의한 ‘조선인의 강제이주시기’로 보고 있다.
  6. 1949년 9월 북경에서는 전국정치협상회의 제1차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 조선족 대표도 정식 대표로 참석하여 중국 조선족이란 법적 지위를 다시 확인하였다.(손춘일, 「광복 후 재만조선인들의 잔류와 국적문제」, 268∼259쪽.)
  7. 김일학, 「중국 조선족 농촌거주공간의 특성과 변천에 관한 연구」, 한양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35∼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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