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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연구 결과물 > 연변 조선족 전통음식 > 보고서 > 이주와 음식문화
4. 연변 조선족 음식문화와 취사공간의 변화

4. 연변 조선족 음식문화와 취사공간의 변화
․길림지역 조선인의 직업은 모두 농업으로서 대부분 수전을 경작하며, 산간부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화전경작을 한다. 이들 대부분은 압록강 대안지방과 남만주철도 연선부근에서의 생존경쟁의 참패자이며, 중국인의 소작농으로서 생활이 빈곤하다.(1)
․1930년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연변지역 조선족의 주식은 ‘피낟이’였다. 피를 가마 안에 넣고 한 번 찐 다음 발방아로 7∼8번 찧었다. 곡식은 옥수수, 수수, 보리, 대두, 열콩 등이 있었고, 조와 벼는 이후에 나왔다. 벼는 1916년에 재배하기 시작하였으며, 채소는 주로 떡호박과 감자였다.
․양곡은 조, 보리, 기장, 대두, 옥수수, 찰수수, 감자 등이 있었다. 찰수수를 심어서 시루떡, 오그랑죽, 지지미(부침개) 등을 해먹기 위해서다. 주식은 좁쌀, 보리쌀, 감자 등 세 가지를 한데 섞어서 지은 ‘감자보리밥’이었다. 부식은 주로 고추장, 된장, 배추김치, 무김치, 짠지 등이었다. 볶음채는 주로 감자볶음인데, 기름에 볶는 것이 아니라, 맹물이나 소금물에 볶았다. 고추장은 가마에 쪄서 먹는다. 된장은 주로 감자찌개나 시래기국을 하는데 사용한다. 식용기름은 들깨기름 뿐이다.
․1932년까지만 하더라도 가축은 소, 말, 돼지, 닭, 거위 등이었다. 일제강점기 이후에야 양을 기르는 집이 생겼다. 양곡은 옥수수, 조, 보리, 기장, 감자 등이 있었다. 조선사람들이 이주한 첫 해에는 거의 매끼마다 먹는 주식은 감자였다. 그 당시 화룡현(화룡진)에는 논농사를 하였다. 설 무렵이 되면 지게에 좁쌀이나 닭알(계란)을 지고 70리 길을 걸어 삼도구에 가서 입쌀을 바꿔왔다. 다른 날은 이밥을 먹을 수 없다. 산간에서 사는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먹는 주식은 감자음식이다. 감자로 만드는 떡은 감자지지미, 감자떡, 언감자떡, 감자가루밴새(만두) 등이 있고, 감자로 만드는 국수로 막갈이국수, 감자국수, 분탕 등이 있다. 그 외에 감자로 엿도 달인다.
․주식은 감자와 보리밥이었으며, 간혹 돌피밥을 먹을 때도 있었다. 감자는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 수 있으며 저장하기도 편리하다. 그러나 돌피를 쌀로 찧자면 많은 품이 든다.
․보리, 대두, 옥수수, 조 등인데 절반 이상을 보리를 먹었다. 감자보리밥(감자, 보리쌀, 좁쌀을 섞은 것)을 먹으면 괜찮은 편으로 조밥은 고급음식에 속한다. 농사일이 덜 바쁠 때는 감자음식이나 옥수수 죽을 먹으며 저녁은 모두 옥수수죽을 먹었다. 일상 부식은 감자장과 김치뿐이다. 떡의 종류로는 쑥떡, 송기떡, 둥글레떡 등이 있다.
․일제시기의 주식은 조밥이었다. 그 외에 수수밥, 보리밥, 옥수수죽 등을 먹었다. 겨울에는 하루에 두 끼만 먹었는데, 주로 옥수수죽을 먹었다.
․청조시기에 조선에서 건너온 사람들은 나무를 베고 황무지에 불을 놓은 곽지(괭이)로 땅을 파서 밭을 일구었다. 첫해는 감자를 심고 이듬해나 삼 년째부터 기타 양곡작물을 재배한다. 1947년에 처음으로 벼농사를 시작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양곡은 기장, 돌피, 보리, 귀밀, 조, 옥수수, 대두 등이었다. 보리는 곡우에 파종하여 중복이면 수확한다. 때문에 보리를 많이 심는다. 조선에서 처음 이사해 왔을 때는 감자와 보리를 많이 심는다. 그러다가 점차적으로 조 같은 작물을 심는다.
․위만주국시기까지 옥석촌에는 수전이 없었다. 양곡으로 조, 대두, 옥수수, 보리, 찰수수, 감자, 기장 등이 있었는데, 그 중 가장 많은 것은 대두, 보리, 조였다. 집집마다 찰수수를 심는데 지지미를 지져먹기 위해서였다. 평소 주식은 감자보리밥이다. 남새는 배추, 무, 고추, 오이 등이 가장 많았고, 떡호박, 가지, 홍당무, 빨간무 등은 흔하지 않았다. 식용기름으로 들깨기름을 먹었다. 주류는 막걸리와 토주가 있다. 토주를 ‘가매뚜비술’이라고 하였는데, 술을 고는 방법은 옥수수를 물에 푹 불렸다가 망에 갈아서 끓인 다음 독안에 넣고 냉각시킨다. 누룩을 넣어 봉한 후 발효시킨다. 약 7일 지나서 그것을 가마에 쏟아 넣고 그 위에 빈 대야를 띄워놓는다. 가마 입구에 볏짚이나 천을 똬리 모양으로 얹어놓고 솥뚜껑을 거꾸로 덮는다. 가열할 때 솥뚜껑에 찬물을 자주 붓거나 얼음을 놓는다. 가마 안에서 증발되는 기체가 차가운 솥뚜껑에 부딪쳐 액체로 변하여 대야 안에 떨어진다. 이것이 토주이다. 토주의 도수는 30도 정도 된다. 토주를 고을 때 가마뚜껑이 큰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것을 ‘가매뚜비술’이라고 한다.
․ 9·18 사변 전에 주식은 보리, 감자, 귀밀, 옥수수였고, 조와 벼는 보지 못했다. 채소는 배추, 무, 보리밭무, 사탕무잎, 떡호박, 오이 등이 있었다. 오이는 흔치 않았다. 가지와 토마토는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했고 수박도 구경 못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양식배급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조선족에게는 좁쌀을 주고 한족과 만주족에게는 수수쌀을 주었다.
이상의 인용문들은 『중국조선족풍속백년』(정협 연변조선족자치주위원회, 2011)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들 가운데 조선족 이주 초창기의 음식문화와 관련한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조사 대상지역은 연변지역이다. 이들 조사 내용을 보면 조선족 이주 초창기에는 수전(水田)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수전이 1916년부터 시작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연변 지역에 보편화된 것은 1940년 이후부터인 것으로 보인다. 이주 초창기에는 화전(火田)을 통해서 감자, 옥수수, 수수, 조, 보리 등을 수확하였고, 이를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조선족 이주 초창기의 이러한 경험들은 2014년에 있었던 연변 조선족 음식문화 조사에서도 제보자들의 기억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1) 조선족 음식문화의 변화
조선족은 집거지역이나 산재지역이나 할 것 없이 김치, 장국, 냉면, 찰떡, 골미떡 등 전통음식을 지금도 선호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음식이 북한이나 남한의 전통음식과 조리하는 방법이나 맛이 구별된다. 그리고 ‘밴새’, ‘왠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한족음식의 영향을 받아, ‘향채’나 ‘화죠’같은 향신료도 많이 사용하며, 볶음 요리를 즐기고 한족들이 사용하는 직사각형 칼이나 원목을 이용한 도마를 많이 사용한다.
특히 20세기 1940∼1950년대 농업 ‘호조조’와 ‘인민공사’화에 이르기까지 ‘토지, 가축, 농기계 등 주요 생산 자료를 공동소유로 돌리고, 노동에 따라 분배하는 원칙’은 조선족과 다른 민족 간의 단결에 많은 혼란을 가져왔으며, 생산량을 저하시켜 식생활에 많은 영향을 가져왔다.
1960년대 문화혁명이 시작되면서 조선족은 한반도와 관련해서 ‘조선특무’, ‘외국간첩’ 등이라는 피해를 받았다. 그리고 조선족 문화 전승이 부인되었으며, 귀중한 민속자료나 유물들도 유실되었다. 한편, 1980년대에 와서는 개혁개방 후 조선족 농촌은 집체소유에서 호도거리 소유로 넘어갔다. 따라서 조선족의 음식문화도 개개인의 선호와 시장성에 의해서 새롭게 변화되어 갔다. 예를 들면, 일상음식인 입쌀밥, 장국, 김치, 산나물 이외에도 의례 때만 먹던 냉면, 찰떡, 순대, 밴새, 막걸리 등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게 되었다.
(1) 조선족 음식문화의 정착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이주한 조선족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대부분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정착했기 때문이다. 이주 초기 조선족의 주식은 조, 수수, 보리, 옥수수, 콩, 감자 등이 주를 이루고, 부식으로는 배추, 오이, 가지, 무, 갓, 영채 등의 채소들로 만든 김치와 된장국, 그리고 도라지, 더덕, 고사리, 취, 두릅 등 산나물 무침이 전부였다. 많은 지역에서 감자를 주식으로 먹기도 했다.(2) 길림성의 장백조선족자치현이나 연변의 산간지역에서는 일 년 내내 감자를 주식으로 하는 마을들이 있었다. 이들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감자음식이 발달했는데, 감자밴새, 감자국수, 감자지지미, 감자찰떡 등이 가장 대표적이다.
(2) 가정 중심의 음식문화 형성
1945년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연길은 동북에서도 가장 먼저 중국공산당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 뒤 토지개혁을 통해 조선족들은 처음으로 토지를 평균 분배받았다. 중국 건국이후 추진된 사회주의 개조를 통해 토지는 다시 국가소유로 넘어가고 농촌에서는 마을 단위로 집단노동을 전개해 나갔다. 집단노동에 힘입어 조선족 집거구역에서는 수전개발이 진행되었다. 연변만 놓고 보더라도 1949년 건국당시 수전의 총 면적은 40여 만무에 달했으나, 1952년에는 54.2만무, 1957년에는 76.9만무에 이르렀다.(3) 곧 현재의 절반에 이르는 수전이 1950년대에 집중적으로 개발되었다. 따라서 조선족의 주식이 쌀밥으로 대체된다.
한편, 1955년부터 실시된 식량배급제로 인해 음식재료의 확보가 어려워졌다. 콩기름을 예로 든다면, 1970년에 연길에서는 일인당 매월 0.15㎏씩 배급했다. 이럴 경우 4인 가족 1개월의 콩기름 배급량은 0.6㎏가량 되는데, 이 정도의 양으로는 볶음채를 하기 어려울 정도다. 따라서 가정마다 제한된 재료를 이용해 음식을 만들다 보니 다양한 음식문화를 접하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가정 중심으로 음식문화가 형성하게 되었다.
(3) 음식의 상품화
1978년 개혁개방이 실시된 이후 연변 각지에는 개인 음식점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1970년에는 86개소이던 것이 1988년에는 2,662개소로 늘어났다. 이들 음식점에서는 냉면, 개장국, 찰떡, 불고기, 쇠고기회(육회), 매운탕, 신선로 등이 인기가 높았다. 조선족의 대표음식들은 이때부터 가정이 아닌 시장과 음식점 등을 중심으로 이어가게 된다.
2) 조선족 취사 공간의 변화
조선족의 생활공간은 한반도보다 기온이 훨씬 낮은 중국 동북지역이다. 효율적인 난방을 위해 조선족은 가옥 내부 대부분 면적에 온돌을 설치한다. 따라서 음식조리와 난방은 주방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이다. 곧 부엌은 음식을 조리하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가옥의 난방을 책임지는 시설이기도 하다. 조선족은 연기 방지와 열효율을 위해 두세 개의 가마를 부엌에 일렬로 고정해 놓고 그 밑에 불을 피운다. 이런 주방구조는 밥을 하거나 국을 끓이기에는 적합하나 중국식 볶음채를 하기에는 불편하다. 이주 초창기 조선족 음식에서 볶음채가 적은 이유 가운데 한 가지가 이러한 주방구조 때문일 수도 있다.(4)
198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조선족 가옥에는 ‘전병가마’라는 것이 도입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일종의 평가마로 한족들이 전병을 구울 때 많이 사용했다. 조선족들은 부엌에 있는 조선족 가마 중의 하나를 철거하고, 거기에 전병가마를 바꾸어 설치했다.(5) 전병가마 위에 몇 개의 솥을 올려놓고 동시에 여러 가지 음식을 조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장점 때문에 전병가마는 몇 년도 안 되는 사이에 조선족 집거구역으로 신속하게 퍼져나갔다. 전병가마의 보급으로 조선족 식단에 볶음채가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늘어나게 되었다.
1990년대 중반에 이르면 도시 아파트에 집중난방시설이 도입되면서 온돌이 사라지고 전기밥솥과 가스레인지가 주방을 점유하게 된다. 이때가 되면 주방에서 튀김, 졸임, 볶음 등 요리를 충분하게 만들 수 있게 되고, 주방구조는 더 이상 음식의 종류를 제한하는 요인이 되지 않는다. 곧 조선족 주방구조의 변화는 음식 식단의 다양화를 가져오게 되는데, 주방 구조의 변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연료의 변화
조선족 거주지의 근대화과정은 연료 변화에서부터 시작된다. 초기의 장작나무와 볏짚의 사용에서 석탄, 프로판액화가스 등의 연료 사용으로 변화했다. 특히 1980년대 후반부터 농촌지역에 보급되기 시작한 액화가스는 솥의 사용 빈도를 감소시키고, 식구가 적은 집에서는 가스레인지와 냄비로 밥을 짓게 되었다.
(2) 취사도구의 변화
액화가스가 등장하기 전 모든 취사행위는 ‘가마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장소는 계절에 따라 실내와 실외로 구분되는데, 실외부엌의 경우 아궁이, 솥, 굴뚝의 일체형으로서 구조가 비교적 간단하며, 주로 무더운 여름철과 기타 큰 행사를 치를 때 사용한다. 또한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1970년대 연길시 솥공장에서는 평가마를 대량으로 생산하기도 하였다.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 액화가스가 농촌지역에 보급되면서 가스레인지와 프라이팬의 사용빈도가 높아졌다.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전기밥솥이 조선족 농촌주거에서 보편화되면서 재래식 전통 솥의 사용빈도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여름에는 대부분 전기밥솥으로 밥을 하고, 요리는 주로 가스레인지를 사용하였다. 재래식 솥은 겨울철에 많이 사용하며, 밥을 짓는 기능 외에 평소에 물을 끓이는 기능으로 사용하고, 평가마는 밥을 덥히는데 사용하였다. 또한 대부분 농촌지역은 식구가 줄어 작은 밥솥의 사용빈도가 높으며, 손님이 있을 경우에만 큰 솥으로 밥을 짓는다.
(3) 취사방식의 변화
취사방식의 변화는 결국, 연료 및 조리기구의 변화에 의해 변화한다. 프로판액화가스의 보급 및 가스레인지, 프라이팬의 사용은 재래식 부엌공간에서 조리기구의 배치를 위한 새로운 공간을 요구하였다. 가스레인지와 프라이팬을 부뚜막 안쪽 바닥 공간에 배치하여 과거방식 그대로 좌식을 유지한다. 또한 아궁이 쪽의 바닥공간을 개방하여 주변으로 약 60㎝ 높이의 조리대를 설치하고 가스레인지, 프라이팬을 놓았다. 곧 과거 좌식형태의 취사방식이 바닥에 서서 조리하는 입식으로 변화하였다.
(4) 취사공간의 변화
전기밥솥이 도입되면서 취사 공간의 범위가 다양하게 변하게 되었다. 전기밥솥의 위치를 부엌에서 안방 또는 정지방 등으로 옮겼다. 처음 전기밥솥이 도입되었을 때, 전기밥솥을 부(富)의 상징으로 안방에 배치한 원인도 있겠지만, 식사공간과 가까이 배치함으로 식생활에 편리하기 때문이다. 대부분 지역에서 요리는 부엌에서 이루어지며, 밥은 안방, 또는 정지방에서 전기밥솥으로 취사한다. 가전제품의 사용으로 인해 부엌에서 일부 취사 행위들이 분리되어 기타 공간으로 이행되었다.
(5) 식사공간의 변화
과거 조선족의 식사방식은 남녀가 분리되어 있었다. 가장과 남성은 따로 밥상을 차려야 했고, 여성들은 정지방이나 주방에서 식사를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문화혁명 이후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특히 1990년대 들어서면서 가족 수가 줄어듦에 따라 모든 방들을 털어 하나의 큰 공간으로 사용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따라서 가족들이 정지방에 모여 앉아 식사하는 방식으로 변하였고, 찬장, 냉장고, 전기밥솥 등 가구도 정지방에 설치하여 식사에 편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식사공간에 있어서 ‘띠캉’이라는 공간이 비교적 특징적인데, 이는 조선족의 이주 및 정착과정에서 한족과 만주족 주택의 영향을 받아 생긴 것이다. 여름철에 불을 땠을 때, 식사, 단란 등 행위는 대부분 ‘띠캉’ 공간에서 이루어진다.(6)
  1. 조선총독부내무국사회과 편, 「조선인사정」, 조선총독부, 1927, 43∼47쪽.
  2. 감자는 산이 많은 중국 동북의 고랭지에서도 잘 자란다. 또한 산출이 높고 얼거나 썩어도 음식으로 가공해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3. 전송림, 『연변경제지리』, 연변인민출판사, 1991, 152쪽.
  4. 한 가마에 밥을 짓고 다른 한 가마에 국을 끓이며, 열전달이 잘 되지 않는 가마에는 세수용 물이나 돼지죽을 끓이는 것이 보통이다. 볶음채를 하려면 밥이 다 되기를 기다려 퍼내거나 국을 먼저 퍼 낸 후 조리를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주방구조 때문에 조선족은 1980년대까지 밥, 국, 김치로 구성된 기본식단을 유지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5.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전병가마는 곧바로 빨갛게 달아오르는데, 방안의 수증기 제거와 열의 신속한 확산에 매우 효율적이다.
  6. 김일학, 「중국 조선족 농촌거주공간의 특성과 변천에 관한 연구」, 한양대 박사논문, 201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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