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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조선족의 식문화 형태와 조리도구

6. 조선족의 식문화 형태와 조리도구
1) 상차림
조선족의 일상음식 상차림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많이 변화하였다. 특히, 대가족이 모여 생활하던 방식에서 점차 핵가족이 보편화 되면서 많이 간소화 되었다. 연길지역에는 혼자 거주하는 조선족이 많기에 변화 속도는 더욱 빠르다. 이주 초기만 하더라도 남녀노소의 구별이 명확했었다.
․할아버지는 안방에서 독상을 받고, 아들과 손자는 정지에서 함께 상을 받는다. 여자들은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가마목곁에 모여 앉는다. 상을 차리지 않고 음식을 구들에 놓거나 함지에 넣고 먹는다. 남자들은 놋쇠로 만든 그릇과 수저를 사용하고 여자들은 질그릇을 사용한다.
․중화민국 시기에 모든 연회석은 연령에 따라서 좌석 순서가 결정되며 사람마다 독상을 받는다. 일제강점기에 와서 바뀌게 되었다.(1)
조선족의 일상적인 식사에서 예전에는 남자들에게는 ‘웃방’에다 독상을 차려드리고, 여자들은 ‘가마목’에서 따로 식사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식구가 한 자리에 모여앉아 식사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일상적인 상차림에서도 3첩, 5첩, 7첩 등 규칙에 따라서 차리던 상차림은 찾아볼 수 없고, 임의대로 반찬의 가지 수를 정한다. 다만, 특별히 차리는 연회상이나 손님을 대접하는 상에는 4가지, 6가지, 8가지, 12가지 등 우수(짝수)로 하는 습관이 일부 남아 있기는 하다.
결혼, 회갑, 제례 등의 일생의례와 관련한 상차림에서도 ‘홍동백서’, ‘어동육서’ 등과 3행, 5행, 7행 등의 형식이 소실되었고, 현재는 3줄을 차리든, 4줄을 차리든 ‘보기 좋게’, ‘사진을 찍어도 멋스럽게’ 차리는 것이 기준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생의례 관련 상차림에서 개고기를 제외하고는 보기 좋게 차리려고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연변 색과자’가 일생의례 상차림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2)
2) 식사 예절
조선족은 조선족 나름의 식사 예절과 방식을 가지고 있다. 조선족의 가정에서 지금은 한자리에서 모두 모여 식사하지만, 1970년대 이전에만 하더라도, 식사를 할 때 할아버지는 웃방에서 따로 독상을 받았다. 밥과 국을 뜰 때도 일정한 순서가 있었다. 남자들의 것은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의 순서로 뜨고, 여자들의 것은 할머니, 어머니, 딸의 순서로 뜬다. 그리고 좌석의 위치도 관습적이다. 세대주는 웃방의 벽을 등지고 부엌간의 출입문을 향해 앉는다. 밥과 국을 받을 때, 밥그릇은 왼쪽에, 국그릇은 오른쪽에 놓는다. 이것을 ‘좌반우갱’이라고 한다. 식사를 하는 과정에서 수저를 밥상에 놓지 않는다. 반찬을 집을 때는 숟가락을 국그릇에 놓고, 숟가락으로 밥을 뜰 때는 젓가락을 반찬그릇의 가장자리에 얹어놓거나 왼손에 쥔다. 식사를 마치면 수저를 밥상 위에 놓는다. 어른이나 혹은 손님이 식사를 마치면 여주인(혹은 며느리, 딸)은 숭늉이나, 백수(깨끗한 물)를 한 그릇씩 올린다.(3) 『조선족민속연구』(연변대학출판사, 1996)에 정리된 식사예절 관련된 내용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식사는 반드시 밥상 앞에 모여 앉아하며, 길을 다니며 먹거나 마당에 서서 먹지 않는다.
․집에 찾아온 손님을 특별히 대접한다.
․특별한 음식을 했을 때 이웃과 나누어 먹는다.
․이웃집에서 음식을 보내오면 어른들께 먼저 맛을 보이고 나누어 먹는다.
․밥과 반찬을 담을 때 어른 것을 먼저 담는다.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는 독상을 차려드린다.
․어른이나 손님과 식사를 할 때는 먼저 어른이나 손님이 수저를 든 다음 집주인이나 아래 사람이 수저를 들고, 식사를 끝내고 내려놓을 때도 마찬가지다.
․식사할 때는 자세를 바르게 하며 밥상머리에서 기지개를 켜거나, 다리를 펴지 않는다.
․식사 시에는 웃고 떠들며 잡담하는 것을 금한다. 기분 상하게 하는 말을 하지 않는다.
․먹다 남은 음식을 남에게 덜어주는 것을 삼간다.
․웃어른 앞에서 아랫사람이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어른들이 식사 할 때는 문턱에 앉거나 벽에 기대거나, 누워있으면 안 된다.(4)
조선족의 식사 예절과 방식에서 특별히 언급해야 하는 것이 주도(酒道)이다. 술은 주식 식사에 앞서 상차림을 한 뒤에 반찬과 더불어 마신다. 특히 손님이 찾아온 경우의 주도는 특이하다. 먼저, 가장(家長)이 손님의 연령에 따라 술 한 잔씩을 권하는데, 상대방의 술잔을 가져다가 술을 가득 채우고, “찾아주셔서 고맙다.” 등의 인사를 한 뒤 술잔을 손님에게 건넨다. 이 때 손님은 다른 손님 모두의 술잔이 채워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 뒤에 손님 중 연장자가 집주인을 비롯한 가족의 술잔에 술을 부은 뒤 다 같이 건배한다. 술잔을 들고, ‘건배’를 외칠 때는 서로 잔을 부딪치는데, 식탁에 앉은 사람들의 연령에 따라 연하자가 자신의 술잔을 연장자의 술잔보다 낮은 위치로 부딪쳐야 한다. 연령차가 많이 난다고 판단될 때는 아예 상대방의 술잔 바닥에 자신의 술잔을 부딪친다.
술잔은 한 번에 비워야 하며, 다음에는 주부(主婦)가 손님들에게 연령에 따라 차례로 술을 따르되, 술잔을 건넬 때마다 적절한 인사말을 한다. 다시 건배를 하고 술잔을 비우면, 다음에 손님 중 연장자가 가장, 주부, 다른 손님들의 술을 따르며 인사말을 한 뒤 다 같이 건배한다. 이렇게 공식적인 술 따르기가 끝난 이후에는 가까이 앉은 사람이나 원하는 사람에게 술잔을 권하는데, 우리나라처럼 자신의 술잔을 돌리지는 않는다. 이렇게 술을 따라주고 마시기가 계속되고, 그 간에 이야기를 나누게 되므로 식사시간이 자연히 길어진다. 술 마시기가 끝난 뒤에 밥이나 국수를 먹는다.(5)
3) 조리 도구
조선족 가정의 주방에서 사용하는 도구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가마솥’이었다. 연길에서는 아파트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가마솥은 농촌에 가야만 볼 수 있으며, 현재는 농촌에서도 전기밥솥을 사용한다. 중국 이주 초기에 쪽짐을 지고 두만강, 압록강을 건널 때에도 ‘가마솥’만은 등짐에다 지고 왔다. 194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조선족들이 사용하던 가마솥은 모두 북한에서 수입한 것이었다. 그 당시 사용하던 가마는 모양과 형태가 일부 차이가 나는 ‘평양가마’와 ‘조선가마’였다.(6) 1950년대 조선족자치주가 성립된 이후부터 연길에 ‘조선족가마공장’과 ‘민족가구공장’, ‘사발공장’ 등이 들어서면서 ‘연변식 가마’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연변식 가마’는 ‘평양가마’보다 운두가 서 있으며, 주둥이에 3㎝정도 되는 솥전이 있다. 또한 바닥이 깊은 편이다. 이는 밥을 하는 용도 이외에도 만두나 떡을 찌기에 편리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가마 허리에도 2.5㎝정도 되는 전을 둘렀다. 이러한, ‘연변식 가마’는 크기에 따라서 네 가지가 있는데, 일반 가정에서는 같은 크기의 가마솥을 두 개 걸거나, 크기가 다른 것을 두세 개 걸기도 하였다.
1970년대에 와서는 겨울에 김이 많이 생기는 것을 보완하고, 집안의 온도를 빨리 높여주며, 번철이나 곱돌 그릇을 놓고 반찬이나 장국을 끓이거나 데울 수 있는 ‘평가마(일명 전병가마)’가 생산되었다. 가정에서는 ‘연변가마’ 한 개에 ‘평가마’ 한 개, ‘연변가마’ 두 개에 ‘평가마’ 한 개를 걸고 생활하였다.(7) 그러다가 볶음채를 많이 만들어 먹으면서부터 ‘초차이쿼어’라 불리는 전기채가마를 많이 사용하게 되었다. 가마솥은 밥이나 국을 하는데 쓰이고 ‘초차이쿼어’는 채소나 육류를 볶는데 쓰인다.(8)
가마솥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물독’이다. 가마솥과 마찬가지로 이주 초기에 사용하던 물독은 북한에서 가져온 무쇠나 토기로 된 항아리였다. 대가족이 살 때는 물 소비량이 많고, 우물이나 샘물을 길어다 저장하고 사용하였기에 큰 무쇠독은 매우 중요하였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이러한 것을 구하기 힘들어 점차 구하기 힘들어 질그릇항아리를 주로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1940년대 도문에 ‘량수오지공장’이 세워지면서부터 일반적으로 ‘오지항아리’를 사용하게 되었다. 1980년대부터는 합성수지로 된 물독들이 보급되었고, 이어서 농촌까지도 수돗물이 공급되어 자취를 감춰버렸다.(9)
연변 농촌의 집에서는 ‘식장(찬장)’과 그 위에 놓여있는 사기소래(사기그릇)가 대표적인 것이다. 특히 식장은 ‘저장도구’로 보편적으로 사용하였다. 이주 초기에는 정주간 북쪽 벽이나 부엌쪽 벽 위에 나무판자를 2∼3층으로 ‘덕대’를 만들고 식기들을 올려놓았지만, 1930∼1940년대에는 미닫이문이 달린 작은 식장을 부유한 가정에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1950년대부터는 미닫이 유리문이 달린 식장이 생산되어 보급되었다. 큰 것은 가로 120㎝, 세로 130㎝, 깊이 40㎝로 다섯 식구 이상인 집에서 많이 사용하고, 작은 것은 가로 100㎝, 세로 115㎝, 깊이 35㎝로 식구가 적은 집에서 사용하였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에 와서는 꽃무늬가 새겨진 것으로 가로 180㎝, 세로 180㎝. 깊이 30㎝ 크기가 보통이며, 더 큰 것은 가로 200㎝, 세로 240㎝, 깊이 45㎝ 등도 사용하였다.(10) 현재, 연길 시내에서에는 싱크대가 이를 대신한다.
식기의 변화는 더욱 선명하다. 이주 초기부터 194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수납도구는 모두 나무와 질그릇이고, 두꺼운 사기사발과 놋수저, 놋그릇들은 별로 없었다. 1950년대부터는 법랑그릇과 양철그릇 등이 생산되고 가벼운 사기그릇, 유리그릇들이 목제와 질그릇을 대체하였다. 지금은 플라스틱그릇 사용이 보편적이다.(11) 한국에 왔다가 되돌아간 사람들은 일회용 그릇도 많이 사용한다. 식기로는 밥그릇(지름14㎝), 국그릇(16㎝), 접시(18㎝)를 주로 사용한다.(12)
운반도구로는 ‘상’이 대표적이다. 1950년대 이후에는 소반이 사라지고, 연변에서 만든 ‘두리밥상’이 보편화되기 시작하였다. 상 위에는 노란색 바탕에 모란꽃이나 잉어 등의 그림으로 장식하였다. ‘두리밥상’은 크기에 따라서 지름이 90㎝, 70㎝, 50㎝로 된 것이 있으며, 특히 높이가 24㎝정도 된다. 이는 구들에 앉아 식사하는데 편리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13) 현재는 연변지역의 농촌에도 전기 및 가스가 들어와 식사 및 조리도구가 실용적으로 변화되고 있다.
  1. 정협 연변조선족자치주위원회, 『중국조선족풍속백년』, 료녕민족풀판사, 2011 참조.
  2.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외, 『조선족민속연구』, 연변대학출판사, 1996, 122쪽.
  3. 정협 연변조선족자치주위원회, 『중국조선족풍속백년』, 요녕민족풀판사, 2011 참조.
  4.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외, 『조선족민속연구』, 연변대학출판사, 1996, 120∼122쪽.
  5. 국립민속박물관, 『중국 길림성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1996, 215쪽.
  6. ‘평양가마’는 운두가 안으로 오므라들고, 바닥이 깊지 않으며. 가마 주둥이에 솥전이 없다. 또한, 허리에 지느러미 모양의 날개가 네 개 달려있다. 한편 ‘조선가마’는 운두가 오므라들지 않고, 평양가마와 마찬가지로 솥전이 없으며, 허리에 넓은 날개가 붙어 있다.
  7.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외, 『조선족민속연구』, 연변대학출판사, 1996, 124∼125쪽.
  8. 국립민속박물관, 『중국 길림성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1996, 216쪽.
  9.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외, 『조선족민속연구』, 연변대학출판사, 1996, 125쪽.
  10. 국립민속박물관, 『중국 길림성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1996, 216쪽.
  11.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외, 『조선족민속연구』, 연변대학출판사, 1996, 127쪽.
  12. 국립민속박물관, 『중국 길림성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1996, 216쪽.
  13.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 외, 『조선족민속연구』, 연변대학출판사, 1996, 1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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